▲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자리잡은 부석사는 신라 천년 고찰로 산사가을 풍경으로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눈이 시린 부석사 단풍길의 낭만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자리잡은 부석사는 신라 천년 고찰로 산사가을 풍경으로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특히 일주문에서 사천왕문까지의 은행 단풍길은 눈이 시릴정도로 노랗다. 그리고  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때 부석사의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황혼(黃昏) 전경은  아름답다.
태백산 부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6 (676년)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고 한다.
부석사는 명찰(
名刹 )답게  이곳에는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조사당(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원각전·안양루·선묘각·응진전·자인당·좌우요사·취현암 등의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부석사는 천왕문에서 안양문까지 108개의 돌계단을 밟아 오르는데 이는 108번뇌 (煩惱)를 제도한다는 뜻의 표현이다.
부석사의 대표적인 볼거리는 일반 사찰의 대웅전 격인 무량수전과  절 입구의 은행나무길 그리고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전경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큰 은행나무길이 많이 있지만, 부석사 은행 나무길은 운치있는  길이다.
사계절 모두 좋지만 특히, 눈이 시리도록 노란 단풍이 곱게지는 만추에 이 길을 걷노라면 마치  극락의 진입로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의 길이다. 경사진 흙길에 길의폭이 은행나무와 잘 어울리고, 무량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에서일까!,

 

Tip  부석사의 창건 설화
<삼국유사>에 이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661년(문무왕 1) 불교 공부를 위해 당나라를 향해 떠난 의상은 상선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했는데, 그 곳 어느 신자의 집에서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신자의 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했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을 발하게 했다.
선묘는 그 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고,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했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 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법복과 집기 등을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 버렸으므로, 급히 이들을 넣은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 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향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는 배를 향해 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했다.
곧 이어 선묘는 다시 서원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옹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은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의상을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을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여기에는 도둑의 무리 500명이 살고 있었다.
이 때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들을 위협하여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했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로 지었다. 현재 이 절 무량수전 뒤에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당시의 그 바위라고 전해진다. 2005.10.27 사진.글 :정해유(영남일보사외편집위원)


  

 ▲   부석사 은행나무 길은 사계절 모두 좋지만 특히, 눈이 시리도록 노란 단풍이 곱게지는 만추에 이 길을 걷노라면 마치  극락의 진입로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의 길이다. 경사진 흙길에 길의폭이 은행나무와 잘 어울리고, 무량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에서일까!,

 ▲   일주문에서 사천왕문까지의 은행 단풍길은 눈이 시릴정도로 노랗다.

 ▲   부석사 가는길 은행나무 도로의 가을 풍경

 ▲    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때 부석사의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황혼(黃昏) 전경은  아름답다.

▲   국보 제18호 무량수전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은 현재 부석사의 주요 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서방 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이라 하여 다른 말로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   부석사 안양루(浮石寺安養樓)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인 무량수전의 앞에 세운 2층 누각(樓閣). 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때 부석사의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황혼(黃昏) 전경은  아름답다.

▲   선묘각(善妙閣)
부석사 창건에 얽힌 선묘와 의상조사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
의상조사가 당나라 양주(楊州)에서 신병으로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유숙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善妙)라는 처녀가 있어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의상조사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의상은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게 되었다.
그녀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조사는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선묘가 조사에게 청하기를 "귀국하실 때 이곳을 지나시면 꼭 소녀의 집에 다시 한번 들려 주시고 가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대사는 이러한 부탁을 쾌히 승락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의상은 당나라 서울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 (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唐)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범하려는 형세 임을 알고, 문무왕 11년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의상조사는 귀로에 양주 선묘의 집에 이르니 마침 출타중이라 선묘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전해 달라고 그녀의 부모에게 부탁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한편, 선묘는 조사의 귀국 선물로 법의(法衣)를 정성껏 마련하여 손꼽아 기다리던 중, 잠시 집을 떠난 사이에 조사가 여정이 급하여 머물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물을 가지고 조사를 뒤좇아 산동성(山東省) 해안에 다다르니 의상이 탄 배는 바다 위에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들고 있던 선물을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하기를 "진심으로 조사님을 공양하오니 원컨대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하였다.
때마침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조사가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기를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지니, 기이하게도 선묘는 바랐던 대로 용이 되어 조사의 멀고 험한 귀국의 길을 줄곧 호위하였는지라,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아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본 즉 화엄종지(華嚴宗旨)를 크게 선양할 수 있는 명산이나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교(異敎)의 무리 5백여명이 점령하고 있으므로 수차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이 막무가내로 듣지 아니하여 고심을 하고 있을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공중에서 바라보니 순리로는 조사의 뜻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짐작하고 법력을 써 지금의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 3차례나 하였더니,무리들이 겁을 집어 먹고,굴복하였다. 이 자리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 부석사이며 이교도들을 놀라게 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세번이나 떴다는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러 무량수전 서편 암벽 밑에 거대한 모습으로 묵중히 앉아 있다.
그리고 선묘룡(善妙龍)은 석용(石龍)으로 화하여 무량수전의 자리에 안좌하여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려 하므로 조사를 크게 감격케 하였다. 지면에서 2척 깊이에 묻혀있는 48척의 석룡은 그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主佛)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펼쳐 있다.  
이 석룡은 67년 5월에 신라 5악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발굴하여 5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데 성공하였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삼국유사, 조선금석총람,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한국의 사찰 9 -부석사(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6),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시대(세기) : 신라(7)
답사여행의 길잡이 10권, "경북 북부"편
아름다운영주(이재우)웹사이트
나무아미타불 웹사이트